사놓고 안 읽는 책, 왜 계속 늘어날까

미래의 나를 계산대에서 만나다
서점에 가면 미래의 나를 만납니다. “이번엔 읽겠지” 하며 계산하고, 집에 오면 이미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책상 옆, 침대 머리맡, 가방 안. 미독 더미는 실패 목록이라기보다 기대의 재고입니다. 그 기대를 사는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취향을 확장하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요. 서점에서 설레는 감각은, 그 자체로 독서 생활의 일부입니다.
문제는 재고가 안 보이면 불안해진다는 점입니다. 뭐가 있는지 모르는 쌓임은 죄책감만 키웁니다. “또 샀어”, “또 안 읽었어”가 반복되면, 책장이 즐거움이 아니라 미완의 숙제처럼 보입니다. 그때부터 새 책을 고르는 손도 무거워집니다. 사 둔 책이 있는데 또 사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쌓인 책부터 읽자니 손이 가지 않습니다.
“다 읽고 나서 사라”는 조언도 있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맞습니다. 다만 취향은 미리 사 두고 나중에 확인하는 방식으로도 자랍니다. 필요한 건 구매를 멈추는 일만이 아니라, 산 책을 보이게 두는 일입니다. 보이면 선택이 되고, 안 보이면 죄책감만 됩니다. 죄책감은 읽기를 돕지 않습니다.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모든 책을 완독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어떤 책은 조금 읽은 뒤 취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소유”와 “진행”을 구분해 두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 아직 안 펼친 책
- 지금 읽는 책
- 읽은 책 (또는 그만둔 책)
이 세 가지만 나눠도 “산 책 = 다 읽어야 할 숙제”에서 조금 벗어납니다. 그만둔 책을 실패로 두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취향을 확인한 기록일 수 있으니까요. “안 맞았다”도 정보입니다.
머리로만 기억하면 미독은 계속 흐릿합니다. 어디에든 목록으로 두면, 다음에 고를 책이 보이고 죄책감은 줄어듭니다. 보이는 재고는 관리할 수 있습니다. 안 보이는 재고는 감정만 키웁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정리의 출발점은 “다 읽자”가 아니라 보이게 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면, 오늘은 이 책, 다음엔 저 책처럼 대기열이 생깁니다. 대기열이 있으면, 쌓임이 덜 무섭습니다.
목록이 보이면 관계가 달라진다
삐삐북에서는 그걸 ‘읽고 싶은 / 읽는 중 / 읽음’으로 나눠 두게 만들었습니다. 앱이 없어도 노트에 적어도 됩니다. 중요한 건 쌓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는 쌓임은 관리할 수 있고, 안 보이는 쌓임은 감정만 키웁니다. 감정을 줄이는 첫걸음이 목록입니다. 목록부터 펼치면 됩니다.
미독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미독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속도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쌓여 있어도 “내가 고른 대기열”이면 괜찮고, “실패한 더미”면 괴롭습니다. 분류는 그 이름을 바꿔 줍니다. 사놓고 안 읽는 책이 계속 늘어나는 이유를 게으름으로만 단정하기 전에, 먼저 목록을 한번 펼쳐 보시면 좋겠습니다. 목록이 보이면, 책장과의 관계가 조금 덜 무거워집니다. 관계가 가벼워지면, 다시 펼치기도 쉬워집니다.